Study/역사

세종대왕 업적 꼼꼼정리 - 훈민정음 창제, 황희정승

나거짓말안해 2020. 5. 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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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은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훈민정음 창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당시 시대상도 청렴한 황희 정승을 통해서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황희 정승 이야기

낡은 지붕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방 안에서 우산을 쓰고 책 읽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정승 유관이었습니다. 낡은 지붕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방안에서는 우산을 쓰고 책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정승 유관 이였습니다. 옆에 있던 부인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습니다.
"정승 집에 빗물이 샌다면 누가 믿겠어요?"
"부인,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어서 비를 피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산도 없지 않소. 그러니 너무 한탄하지 마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정승을 지낸 황희에게서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정말 돈이 없어 비가 샐 정도로 가난하게 산 것일까요?
황희 정승도 한때 뇌물을 받았다가 왕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재물을 모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세종 대왕 때에는 이렇듯 재물 욕심이 없는 재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황희가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낼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까닭을 보여 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황희가 잠시 안채에 들렀을 때, 여자 종 둘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리 싸워도 결론이 나지 않자, 황희에게 판결을 부탁했습니다.
황희는 먼저 한 사람의 딸을 다 듣더니, 다음과 같이 말습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화난 말투로 자기주장을 폈습니다. 다른 종의 말을 다 들은 황희가 다시 말습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네 말이 옳구나."
기가 막힌 두 사람이 황희에게 물었습니다.
"대감마님께서는 저 사람에게는 저 사람의 말이 옳다 하시고 저에게는 또 저의 말이 옳다고 하시니,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그때 옆에 있던 부인이 거들며 말습니다.
"누가 옳은지는 말씀해 주셔야죠."
그러자 황희는 껄껄껄 웃으면서 말습니다.
"듣고 보니 부인 말도 옳은 것 같구려.”
별것 아닌 일로 싸우던 두 사람은 그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여 다투었던 것입니다.
"대감마님, 소인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화해습니다.


영의정은 신하들과 왕의 의견이 서로 다를 때 또는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다를 때 이를 조정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의정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황희는 부드러운 인품과 공정한 마음으로 이러한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그러나 황희가 모든 일에 무조건 타협하고 조정만 던 것은 아닙니다. 황희는 태종이 큰 아들 양녕 대군이 아닌 셋째 아들 충녕 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할 때 끝까지 반대해서 5년 동안이나 귀양을 가기도 습니다. 

 

황희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이처럼 황희는 유연하면서도 곧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훌륭한 재상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까만 소를 타고 다니며 소탈하게 산 맹사성과 허조 같은 훌륭한 정승, 사군과 육진을 개척하여 북쪽 국경을 안정시킨 김종서 등이 세종 대왕 때 이름난 신하들이었습니다.

 

세종 대왕 때에 살기 좋았던 것은 가뭄과 홍수 같은 재앙과 외적의 침입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종 대왕 때에는 왕과 신하 어느 한쪽으로 힘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인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세종대왕과 바른말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신하들이 하나가 되어 정치를 습니다. 그리하여 세종 대왕은 백성이 근본이 된 정치를 펼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 업적 - 훈민정음 창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와 서로 맞지 않는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니,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 이것을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쓰기
편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 [훈민정음]

 


이것은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설명한 글입니다. 세종 대왕은 백성들이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명령하는 일을 잘 몰라 죄를 짓는 것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습니다. 또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새 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습니다.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네요

 

훈민정음은 세종 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성삼문과 신숙주는 말소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요동 지역에 귀양 와 있던 중국 학자 황찬을 수없이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세종 대왕도 몇 년 동안 한글을 만드는 데 열중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마침내 1443년, 편리하고 과학적인 우리 글자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현전 학자들 모두가 한글을 만드는 데 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만리 등 몇몇 학자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어렵게 하고 성리학을 받드는 것을 가로막는다 하여 반대습니다.
많은 유학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를 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수양 대군을 시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다룬 〈석보 상설〉을 한글로 번역하게 하고, 세종 대왕 자신도 한글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송하는 〈월인천강지곡〉을 지었습니다. 또 나라를 세운 업적을 한글로 적은 〈용비어천가>를 펴내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습니다.

 

처음에 훈민정음은 궁궐의 궁녀들과 양반 부녀자들이 쓰기 시작습니다. 그러다가 곧 일반 백성들 사이로 퍼져 나갔습니다. 백성들을 위하는 세종 대왕의 뜻이 높고 위대한데도, 뒷날 연산군은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자 한글 사용을 금지습니다. 한편 유학을 높이 받드는 유학자들도 여전히 한글을 무시습니다.

 

한글을 만든 집현전은 인재를 키우고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세종 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이 공부에만 힘쓰도록 오랫동안 휴가를 주는 등 여러 모로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왕 앞에서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강의하면서 나라의 일 을 토론하는 경연도 맡아했습니다. 경연을 통하여 나라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많아지자 나중에는 사간원이나 사헌부처럼 언론 기관의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라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제도들을 연구해가고 책들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천문과 지리 의약 농업 에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연구함으로써 세종 대왕 때의 문화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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