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신라의 삼국통일 #2
    Study 2016. 6. 16. 18:24
    반응형

    오늘은 신라의 삼국통일 2번째 시간으로서 적어보려고하는데요 저번시간에는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 적었었는데요 오늘은 신라의 삼국통일 부터해서 나당전쟁으로 써내려가려합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나당전쟁

    원인

    원인은 당이 신라와 함께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명망시킨것인데 결국에는 신라를 이용해서 우리나라전체를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후에는 당은 백제의 옛땅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옛영토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해서 지배를하려고했으며 신라가 반발을 하자 경주에또다시 계림도독부를 두고서는 신라 귀족의 분열을 시키려고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했다.

     

    신라의 대응

    이에맞서서 신라는 당과 맞서싸움으로서 민심을 수습하고자했으며 당의 전력을 전체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서 옛고구려왕족인 안승이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워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하게끔 후원을 했었다. 그리고는 백제의 옛땅에 대한 지배권도 장악해나갔고 이후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함께 연합을해서 정면대결을 벌였다.

     

    당의축출과 삼국통일

    신라군대는 남침해오던 당의 20만군대를 매소성전투에서 대파했으며 이떄가 675년이였고 나당전쟁에서의 주도권을 초반에 우세하게이끌어갔다 그리고 금강하구의 기벌포 에서는 당의 수군을 전멸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 당나라군대를완전히 몰아내기에 이르렀고 통일을 시켰다.

     

    통일 의지는 고대국가의 확립기인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러서 삼국이 공히 나타나고있었는데 백제와 고구려는 계승과 발전을 시키지못했으며 신라만이 투철한 국가의식을 바탕으로 계승과 발전을 시켰다. 결국에는 신라가 당와의 연합작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잡았고 통일신라로 넘어가지만 만주지방에서는 고구려의 남은 유민들이 발해를 건국함으로서 분리가 되었음을 엿볼수있다

     

    삼국통일의 의의

    신라가 당나라를 무력으로 물리침으로서 최초로 민족통일을 이뤘다. 서로다른 국가체제속에서 생활하던 백제와 고구려는 통일신라라는 그룹에 속하게되었다. 이로서 민족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할수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기틀의 초석을 다졋다. 그리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함께 외척세력이 ㄴ당나라를 우리나라에서 몰아내서 자주적인 통일인점에서 의의가 상당이 크다

     

    삼국통일의 한계

    신라의 삼국통일은 통일과정에서 자주적인통일을 했지만서도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백제와 고구려를 몰아냈고 대당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영토만 완전하지않은 불완전하게 차지해서 한계성을 가진다.

     

    통일 신라의 발전

    삼국통일을 한후의 신라사회

    정치적인 안정도모

    통일이후의 신라는 그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밀도가 크게늘어났는데 오랜 전쟁이 드디어 끝나면서 대외고나계가 안정이되고 생산력도 증가했다. 또한 통일 전쟁을 하는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들을 확보할수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는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이뤘다.

     

    민족의식

    신라는 새롭게 통일신라의 지배체제않에서 흡수되어버린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조건없이 적극적으로 포용함으로서 국가의 단결을 도모했고 더욱이 나가서 신라와 백제 고구려 유민들은 힘을합쳐서 당나라를 몰아낸느과정에서 하나라는 국가안ㅇ서의 공동체의식이 생겨났다

     

    왕권의 전제화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백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에 이으렀는데 그땡에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도 재정비하면서 진골세력들의 힘을 다운시키고 왕권을 전제화했다. 이후에도 신라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해서 8세기 후반까지도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는 기록이존재한다. 귀족생활의 풀요로움은 물론이거나와 전쟁이 없는세상에서는 농민들과같은 국민들도 평화로웠다.

     

    왕권의 전제화 확립진행과정

    태종무열왕

    전제왕권의 기틀마련

    통일에 중추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춘추는 진골귀족출신으로는 가장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무열왕은 최초의 전래없는 진골 출신왕으로서 통일과정에서의 전쟁을 치른끝에 왕위에 올랐고 왕권강화의 시작. 신라의 왕은 태종 무열왕의 직계자손이 왕위를 독점하게이르렀고 100년간 무열왕계 직계후손들이 왕위를 계슬. 안정과번영을 최고치로 끌어올림

     

    시중세력의 강화

    중앙의 정치기구는 오아의 직속 기고나으로 왕명을 제대로 받들고 국가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기능을 강화하는 쪽으로 법을 만들었고 시중은 왕명을 받들어서 국정을 총괄책임지는 역할. 그밑에는 13부를 둬서 행정업무를 나눠서 분담하게 하면서 관료의 기능강화.

     

    사정부 설치

    감찰기구인 사정부.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에 앞섰다.

    상대등 억압

    귀족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밑으로 다운시켰다. 이를 통해서 통일이후에 진골귀족세력약화 되었음을 알수있다.

     

    갈문왕 제도 폐지

    왕의 근친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갈문왕 제도폐지

     

    문무왕

    삼국의 통일을 이룩했다.

    통일완성

    무열왕의 뒤를 이어서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드디어 달성하기에 이르렀고 왕권을 크게 강화하고 나라안의 안정을 도모했다.

     

    관제정비

    왕권강화에 핵심적인 관제정비는 우이방부 사록관등 중앙정치기구를 설치. 중요하지않음.

     

    신문왕

    전제왕권의 확립

    신문왕때는 갖아 중요한 사건이 바로 김흠돌의 모역사건인데 문무왕다음의 왕이 신문오아인데 신문왕은 김흠돌이 일으킨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세력들을 진압하고 숙청하면서 정치세력을 오나전 갈아엎었다. 이에따라서 귀족세력약화 전제왕권의 확립. 신문왕이 왕이되던해에는 왕의 장인 김흠돌모역사건 일어남. 이사건에 많은 ㅟ족들이 고나련되어있어서 귀족들에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었는데 이거를 잘살려서 왕권이 전제화시켰다.

     

    군사조직

    중앙군은 9서당 지방군을 10정 일명 9서당 10정인데 9서당은 고구려와 백제인과 말갈인들을 포함. 이는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는 신문왕의 큰 의지. 지방의 10정은 각주에 1개씩 배치. 다른부보다 방위 지역이 넓고 북쪽인 한주에는 2정을 둠.

     

    지방행정조직

    9주5소경

    편재성을 완화 일반백성들도 한국가의 국민으로 융합시키려고 9주5소경체제의 지방행정 조직을 완비했다 이떄가 685년.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옛 백제와 고구려제역에 각각 3주씩 설치해서 도독파견. 특수행정 구역으로는 행정 군사상의 요충지인 5소경을 설치. 9주5소경. 9주 밑에는 군과 현을 두면서 지방관인 태수와 현령을 파견. 중앙 집권적 통치 조직을 훨씬 강화. 5소경은 경주다음으로의 정치적 문화적인 허브지역

     

    특수행정구역설치

    말단 행정 구역인 촌은 토착세력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아서 다스림. 3년마다 촌락문서작성. 촌락 문서에서 노동력을 필요하면 차출 했었고 조세도 거뒀다. 향 부곡의 특수 행정구역도 설치

     

    상수리 제도

    지방 세력의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 지방세력을 수도에 머물게 하는 상수리제도. 이제도는 지방의 반란세력들의 반란을 꿈꾸지못하게 한것.

     

    사민정책

    5소경에는 일부의 중앙귀족과 함께 옛 가야와 백제 고구려귀저ㅗㄱ들이 옮겨살게 이주시켰다. 이것은 금성이 한반도 남쪽에 치우쳐져있는 약점을 완벽하게 보안했다는 평이 지배적.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을 꾀함과 동시. 지방세력의 성장을 감시하기위한 목적.

     

    진골세력의 억압

    관료전은 문무고나리들에게 지급했고 귀족의 경제기반이자 돈줄인 녹읍폐지. 이와같이 왕권이 전제화되가면서 진골은 약화 진골에게 억눌러져서 생호라하던 6두품은 서서히 힘을 되찾아가는데 6두품은 실력이 되니까 오아과함께 정치적인 조언자로 활동. 행정실무도 도맡았다.

    국학설치

    유교정치이념의 확립을 위해서 유학 사상을 강조. 국학을 설립해서 인재를 양성. 전제왕권을 뒷받침했다.

     

    만파식적

    피리를 불면 적이 도망가면서 재앙이 날아간다는 내용의 설화는 널리퍼지면서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신라의 모습이 시대상 매우 잘반영. 거센물결을 자세하는 피리라는 뜻을가진 만파식적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더이상의 전쟁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ㅁ낳은 이들의 목소리도 담겨있다.

     

    감은사 창건.

    신문오아은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이어서 동해안 해변에 감은사지음. 동해로 들어오는 왜적을 막으려는 의도

     

    달구벌 천도계획

    경주가 수도였는데 달구벌은 대구를 말한다 대구로 옮기려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

     

    성덕왕

    업적

    국학재정비해서 유교교육기관임을 더욱 공고히 다졌고 당의 현종과 국겨를 재개. 일본과 친하게 지내서 견신라사 파견

     

    오늘은 발해의 건국전까지만할게요 정전도 지급. 귀족의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국가가 백성을 직접지배하려는 속내를 드러내지않음으로서 백성에게도 ㅈ\ㅓㅇ전을 지급했다.

     

     

     

     

    상원사 동종 주조

    가장 오래되고 이쁜 동종을 만듦

     

    경덕왕. 업적 : 유교 교육을 강화하기위해 태학감을 기존의 국학에서 변경하면서 학문과목을 더욱도 고도화시켰다. 중앙 관료릐 칭호와 지방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한자이름으로 고쳤고 경주의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도 이대 건립.

     

    녹읍 부활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서 관료전폐지 녹읍이 부활

     

    혜공왕

    대공의 난

    혜공왕초기;에는 대공이 아우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96각간이 무려 100일동안 싸웠는데 이것은 혜공왕시대에 일어난 귀족들의 반란의 시초였고 이러한 반란은 왕권 약화와 왕실이 잡아먹히는 형국에 몰렸다

    선덕여왕

    경덕오아이 성덕왕의 명복을 빌어주려고 큰종을 만드려고했는데 무산되자 그의 아들인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시켰다

     

    통일 신라사회

    전제왕권의 동요 확립된 전제왕권은 진골귀족세력의 반발로 경덕와 ㅇ때부터 흔들리기 시작.

    국가재정 녹읍이 부활되면서 사원이 세금을 안내는곳이 늘어감에따라서 국가적인 손실\이 컸다.

    자연스럽게 농민들의 삶에 가중화가 되었고 한동안있었던 평화로움이 사라지고 귀족의 직권남용으로인해 농민들의 수탈당함을알수있다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