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삼국 통일과정 꼼꼼정리 1편 후삼국의 성립Study 2016. 6. 24. 12:02반응형
이번시간은 후삼국 통일과정에대해 아주 자세히 적어보려고해요 우선은 중세사회로 접어들게되었고 중세사회에서는 중국을 먼저 살펴볼게요 중국은 5대 10국이라고 해요 10세기 초에는 중국을 살펴보면 당나라가 멸망하게되고 5대 10국이 흥망하면서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계층이 등장해요 그러면서 송나라가 발전을 하게되는데 이대가 고려의 초기와 중기시대인데요 5대의 혼란을 수숩한 송나라는 중앙집권적인 황제 독재체제를 구축하고나서 과거제도를 강화하는데요 분반관려들의 중심이되는 문치주의체제를 견고하게 이어나가요 하지만 송은 국방력이 약화되면서 부터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았었고 그러면서 국가의 재정또한 심하게 고갈이 되어졌어요 이것을 극복하고자 한왕안석의 신법이 실패로 돌아가게되면서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서 북중국을 뺏기고나서 강남으로 이주를 하게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금 양쯔강이남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어서 강남이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허브로 떠오르게되었어요. 이때부터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보급되기시작했어요
후삼국의 성립을 살펴보면 견훤은 전라도 지방군의 군사력과 동시에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해서 완산주에 도읍을 세웠어요 완산주는 지금의 전주에 해당해요 차령산맥이남의 충청도지방과 전라도 지역을 차지함녀서부터 후백제를 건국했어요 그게 바로 900년이에요 하짐나 견훤은 신라에 적개적인감정이있었어요 농민들에게는 지나치게 조세를 갈취했으며 호족세력들을 포섭하는데에 실패했어요 후고구려를 살펴보면 신라왕족 후례였고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궁예는 도적집단의 양길의 아라에 들어가게되는데 세력을 키워서 양길을 몰아낸다음 송악 지금의 개성이죠 송악에 도읍을 정했고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지방에는 후고구려를 만들었다 하지만 궁예또한 견훤과 마찬가지로 조세를 수취했고 죄없는 고나료들을 살해했으며 우리가아는 미륵신앙또한 전제정치수단으로 사용했어요 신하들에의해 축출되었어요 신라는후백제와 태봉의 잦은 침입으로 영토가 경상도 지역으로 줄어들었어요 호족을 잠깐 살펴보면 대토지 소유자이며 경제력을 바탕으로해서 권력과 무역 문화적으로까지 손을뻗쳤는데지방의 유력한 족단이나 그대표자들을 지칭하는단어다. 이들 호족세력은 중앙통제를 벗어나서 스스로가 상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했으며 그 지방의 백성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후아 나말 여초의 사회변들을 주도한 세력이되었어요
왕건
왕건을 살펴보면 왕건은 송악지방의 호족출신으로써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해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해서 성장한 호족들과 연합해서 세력을 강화했다. 궁예의 밑에들어가서 신하가되었고 한강유역을 점령하는등 영토확장에 공을 아주 크게세웠다 특히나 수군을 이끌고서는 나주를 점령해서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데에 아주 큰공을 세워서 광평성시중의 지위까지 오르게되었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상반되게 자신이 호족적인 기반을 가지고있었고 철학또한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 나감에있어서 일치했다. 고려를 왕건이 건국했는데 궁예가 세력을 키우고있을때 송악지방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해서 중국과 해상무역을 통한 호족들과 연합했다. 왕건의 집안이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송악지방호족의 후예인 왕건은 궁예의 신하가 되어서 한강유역을 점령하는등 영토확장에 아주 큰공을 세웠다, 특히우세한 수군을 바탕으로 나주를 점령하는것은 후백제를 견제하기에 충분했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895년 송악을 궁예에게 바치면서 구의 부하가 되었는데 궁예는 왕륭을 금성의 태수로 왕건을 발어참성의 성주로 삼았다. 고려를 건국함에있어서 궁예를 논하지 않을수가없는데 궁예를 보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만한 정치적인 기반이 상당히 적었다 왜냐하면 출신성분이달라서이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을 한다는 의미로서 나라를 고려라고 지었는데 그떄가 918년이다 연호를 천수라고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거지였고 태어나고 자란 송악을 도읍으로 옮겼다. 이로써 남북국 시대릴 이루고 있던 발해와 신라가 외세의 침략과 내부분열 등으로 멸망의 위기에 몰리게 되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혼란이 어느정도 정리가되고 수습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새로운 사회건설의 방향을 제시했다고볼수있다. 왕건은 대내적인 정책으로는 통일에 필요로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고려를 세운 왕건은 안으로는 독자세력을 가지고있던 지방 호족 세력을 흡수통합정책을폈는데 이때 왕건은 호족들과 결혼을 해서 호족들이 쉽게 반란을 못꾸미게 했다. 그리고 세금을 줄이는 등 농민 생활들을 안정시키기에 주도적인 정책을 펼쳤고 후박제가 신라를 자주 침략하는것과 다르게 태조왕건은 신라에 대한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했는데 이것은 후뱍제를 따돌려서 고립시키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신라의 민심마저도 고려에 편에 서게되었다.
후삼국의 통일
중국은 5대 10국의 분열기 였는데 만주서부에서는 거란족이 흥기하여서 발해를 멸망시켰다 후백제는 오와 통교하는 한편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거란과 무역을 시도했고 일본과도 수교를 했다 고려와 후백제의 대립 견훤이 신라에 침입해서 경애왕을 살해햇을때 태조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후백제군과 대구의 팔고산 문경 풍기 안동등에서 전투를 펼쳤다. 처음에는 후백제의 군사력이 강해서 고려군이 수세에 몰리는듯 했지만 안동전투에서는 후백제군을 격파하면서부터 고려는 통일의 주도권을 점차 잡게되었다 신라의 병합을 살펴보면 신라는 계속되는 백제와 고구려의 등쌀에 못이겨서 영토가 줄고있었는데 점점 국력이 쇠퇴해져 오면서 국가의 유지조차 쉽지않게되었는데 대조왕건은 후백제가 신라를 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가서는 후백제군을 신라에서몰아내는데에 성공함으로서 신라인들의민심을샀다 이와같은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데에 유용했다 그결과로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서 전쟁을 치르지도않고서 신라의 영토를 받아내는데에 성공했다.
후백제의 멸망을 크게 나눠보면 견훤의 귀순과 내분의 발생으로 나눌수있는데 후백제는 내부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서는 내분이 생겨서 정세가 고려에 유리하게 되었는데 견훤의 넷째아들 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하자 장남인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서 견훤을 폐위한다음에 금산사에 가두고서는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그리고 견훤이 금산사에 가둬졌을때 탈출해서 고려에 귀한해오자마자 태조는 견훤을 앞세워서 후백제정벌군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고려군이 경북 선산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함으로써 후백제는 멸망에 이르게 되었고 고려는 후삼국의 통일국이되었다. 궁예와 견훤을 살펴보면 전체주민을 통합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정치 이념으로부터 시작된 사회개혁을 성공하지못한데에 의의가 있다고본다 이런 한계점에서부터 궁예와 견훤은 무력에만 주로 의존하면서 지식인들은 배제하고 정치를 한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수있다.
민족의 재통일을 살펴보면 북방 유목지역을 대부분 장악하고나서 중국의 북부로 진출해서 동아시아의 정세를 주도한 거란에 의한 발해의 멸망과 발해유민들의 정안국을 세우는 등 부흥운동이 있었고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하기에 이르럿다 태조는 이들을 우대해서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햇는데 이로써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에 입각했다. 고구려는 후삼국뿐만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까지도 포용했음을 알수있다 국경선확대를 살펴보면 민족의 재통일로 중세사회로 들어었는데 국가의 영역이 신라시대 대동강 선에서 청천강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호족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해서 문벌귀족사회를 만들어나간것 역시 의미가 있다. 고려의 발해유민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살펴보면 당시 고려에 온 발해유민들중에서는 관리와 장군 학자 승려등 상류층의 지식계급이 상당수였다고한다. 태조는 이들에게 적재적소의 관직을 주고서는 후삼국 통일에 활용했다. 특히 934년에있어서는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백성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에 귀하하기에 이르렀다. 태조는 왕계를 내려서 왕실족보에 등록했다 특별히 우대하여서 동족임을 상기시켰다.
태조왕건의정책
수취제도를 만졌는데 채조왕건은 후삼국의분열이 신라사회에서의 모순과 지방세력간의 대두로인해서 나타난것이고 그러한 사회혼란의 근본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조세제도에서 부터 비롯되었고, 경제모순이 있다는것을 인지하고서있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취민유도를 내세웠다 호족들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하고 조세제도를 보다 합리적으로 하려고 정책을폈다 조세율을 생산량의 10분의 1로 낮게 해서 노민들의 생활을 보다 안정적으로 하게끔 유도했다. 여기서 취민유도하고 함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둘때에 일정한 법칙과 법률이 뒷받침되어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유교적인 민본주의를 나타내는말이다. 흑창도 설치했는데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했다.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주고 추수후에 갗게하는 기구였다. 빈민구제기구로서 986년에는 의창으로 전환됐다. 전란중에서 민란중에서도 억울하게 노비가 된자를 풀어주는 아량을 보였고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불교와 풍수지리설을 배척하지않고 존중했다. 그리고 불교와 재래의 관습을 중시하는 뜻을 보였다. 연등회와 팔관회 등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민심을 얻고자 노력도 많이 한모습을 볼수있다. 불교를 믿고 받들고 연등회와 팔관회등등으로 전통적 관습과 관행들을 중요시했고 민심의 안정을 도모했다. 개태사의 창건을 살펴보면은 후백제의 견훤아들인 신검을 무찌리고나서 삼국을 통일한것을 기리기리 기리기위해서 충남 논산에 개태사를 지었다. 그외에도 호족세력통합정택을 살펴본다면 고려 건국이후에 태조 왕건은 사회적은 혼란은 잠재우기 위해 지방의 호족들을 중앙으로 진출시키려고 노력들을 해왔다. 호족들을 중앙으로 끌어안기 위한 정책들도 꾸준히 나왔다.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해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해서 정치제도를 마련했는데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관리로 등용했었다. 지방통치 위임 지방의 중소 호족들에게 호장 부호장 이라는 향이 벼슬을 주어서 향총 사회에서의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했음을 엿볼수있다. 후삼국의 통일후에는 역분전을 지급한것을 알수있는데 인품과 충성도 공로를 크고 작음으로 나누어서 새로운 지배층인 개국 공신과 중앙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데에 힘썻음을 알수있다 정략결혼이 유명한데 오늘날의 일부다처제를 실시했는데 힘히센 지방의 호족들과 결혼을 해서 왕실의 외척으로 삼았다 유대관계를 다짐으로서 호족들에게 자신의 성씨인 왕씨성을 내려줬다. 호족세력들에게는 자신을 낮추면서 대했다. 그들의 지역에대한 지배권을 부분적으로는 아주조금은 인정해줬다. 그렇지만 사심관과 기인제도를 통해서 지방통치를 보완했다. 사심관제도는 중앙의 고관을 본인 출신지에 사심관으로 임명해서 부호장 이하의 향리 임명권을 줘서 사무를 관장케 하는대신에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책임권을 줬다. 조선시대에는 유향소와 경재소로 분리되었다. 기인제도는 지방호족들에게 관직을 호장과 부호장을 줘서 지방자치의 책임을 맡게하는 동시에 지방 호족과 향리의 자제를 수도에 데려다가 두면서 반란을 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통일 신라시대의 상수리 제도와 흡사하다.
반응형'Stud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삼국 통일 과정 3편통치체제 (0) 2016.06.29 후삼국 통일과정 꼼꼼정리 2편 광종 (0) 2016.06.27 발해의 건국과 발전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 3편 (0) 2016.06.22 발해의 건국과 발전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 2편 (0) 2016.06.22 발해의 건국과 발전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 1편 (0) 2016.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