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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건국과 발전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 3편
    Study 2016. 6. 2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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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에 이어서 이제는 마지막편이 될텐데요 발해의 건국과 발전 우리나라의 역사인이유 그대망의 마지막 포스팅을 시작할게요~

    신라말기의 모순부터 시작할게요 우선은 전제왕권체제의 약화와 붕괴가 있을수있겠는데 이러한 전제왕권의 약화를 먽 ㅓ살펴본다면 경덕왕시절에는 귀족들사이에서 전제왕권을 타도하려는 운동이 일어나서 전제왕권의 뒤를 봐주고 든든한 뒷빽이던 무열왕계직계자손들의 쇠퇴기였어요 그러다가 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위해서 정치개혁을 실행했지만 실효성은 거두지못한상태였어요 전제왕권의 붕괴를 살펴보면 혜공왕때 대공의난이있었는데 대공의 난을 진압작전을 펼친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를 했다. 이로써 신라의 하대는 귀족연립적인 방향을 취했다.

    신라말기의 왕위 쟁탈전에대해 살펴볼게요 왕위쟁탈전은 내물왕때부터 시작되요 내물왕계의 왕위계승을 살펴보면 경덕왕때부터 귀족들의 세력이 점차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8세기경 후반 혜공왕이 피살되면서 신라의 중앙정치는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기를 지냈어요 그러다가 이후에는 채종무열왕계의 왕의혈통은 끊기게되면서 내물왕꼐인 선덕왕에 이어서 내물계의 12세손인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어요 그후 150년간 두왕계사이에서 20명의 왕이 교체될정도로 왕위쟁탈전이 극심했어요 그리고 2분째로는 김헌창의 난인데 중앙에서 귀족들의 왕위쟁탈전이 심각해지자 지방의세력가들 또한 중앙정부에 반대를 하는 반란에 참석을했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못한데에 대한 불만으로 옹천주도독 김헌차과 그의 아들이 반란을 도모했는데 일부의 지방세력들이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사건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힘을 못쓰게 되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까지에 이르렀던 계기가 되었어요 우리가아는 해상왕장보고또한 왕위 쟁탈전에 가담했어요 마지막으로는 진골귀족간의 왕위 쟁탈전이 있을수있겠는데 최고신분층인 진골귀족들은 경제기반을 확대해서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는데 권력 다툼은 혜공왕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부터 시작되었다고해도 과언이아니에요 이미 권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혜공왕이 살해되면서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를 하면서부터 진골귀족들간의 세력경쟁과 눈치싸움이 시작되었어요 힘과 무력으로 인해서 언제나 나도 왕위에 오를 수있다는 생각이 널리퍼지게되면서 경제력과 ㅜㄴ사력을 더욱더 힘써모으고서는 귀족들간의 전쟁이시작괴었어요 왕권이 약화되면서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고 집사부 시중보다도 상대등의 권력이 더욱더 커졌음을 알수있다.

     

    농민의 몰락과 민란의 발생에대해서 알아보도록할게요. 우선 농민봉기를 살펴볼게요. 농민봉기는 점점 중앙세력과 귀족들간의 세력경쟁으로 인해서부터인데요. 살기가 어려워지고 피폐해진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서 노비가 되거나 또는 초적이 되기도 했는데요. 결국에는 중앙정부에 대한 불평과불만이 높아졌어요. 그러다가9세기말에는 진성여왕때에는 농민봉기가 전국곳곳에서 발생되면서 신라의 통치기반이점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두번째는 대토지 겸병인데요. 진성여왕때에 이르러서는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쇼유가 확대가 되면서, 농민의 조세부담은 더욱 무거워졌어요. 여기에 흉년과 전염병까지 겹치게되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인해 국가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들에 대한 정부의 더욱 핍박과 압박이 강해졌는데 이떄에 세금을 더내라고하지않나, 일부지방세력의 강압적이고 폭력을 일삼는 행태에서부터 민란이 발생하게되었어요.

     

    지방세력인 호족을 들여다보면은 진골귀족들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는데, 지방에서는 진골귀족들의 세력이 똘똘 뭉쳐서 귀족들간의 귀족들 간의 신라정치를 비판하면서 호족이라고 부를수있는 새로운 신흥 세력이 성장했어요. 호족들은 농민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면서부터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알수있어요. 호족은무엇일까요 호족은 권력투쟁에서부터 밀려나게되어버려서 지방에서의 세력을 기반으로 해서 몰락한 중앙 진골 귀족들이나 6두품계층과 무역에생업을 이루면서 재력과 군사력까지도 소유하고있어서 세력과 군진세력 촌의 행정을 담당한 즉, 촌의 생리를 너무나도 잘알았기에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 출신이 주인이 되는경우가 많았어요. 호족의 활동내역을 조금더 살펴본다면 호족들은 자기본인들의 근거지에서 성을축조하면서 군대를 양성했으며 스스로 성주또는 장군이라고 부르기도했어요 그지방의 백성들을 왕이아닌 호족세력들이 실절적으로 통치했어요 행정권과 군사권을 차례대로 장악해나갔고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지배력을 확대해갔어요 그러면서 자기의 지역에서의 세금을따로 받기까지 이르렀고 이로인해서 ㅈ우앙정부에서는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에서만 받을수없게되었고 호족은 선종과 결탁을 하면서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점차적으로 더욱더 강화했으며 도선이 보급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 세력을 키워나갔어요

     

     

    6두품

    6두품은 신라시대에서 밑에있는 취급을 받았기에 신라에대한 반감이 어느정도 있었는데요 골품제도로 인해서 신분상으로도 아무리 똑똑하고 재능과 인재라도 신분상의 한계는 어쩔수없었던 6두품은 지식인들중에선느 유학을 다녀오거나 똔느 선종승려가 되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사람들도 있었고 일부는 반신라적인 활동을 꾸준히 해왔어요 왕위다툼이 꼐속되고 치열할수록 골품제도는 흔들렸고 이러한 가운데에서 6두품 출신의 일부유학생들은 선종승려와 함께 신라골품제사회를 비판했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정치메카니즘을 제시하기도했어요 6두품세력들은 골품제로인해서 관직승진에 자유롭지못했어요 그래서 진골위주의 정치적인 행태에대한 불만과 불신이 가득했어요 그리고 진골귀족세력에 의해서 자신들의 뜻을 마음껏 펼칠수없었기때문에 중앙정계를 떠나서 은둔생활을 하거나 안빈낙도하는삶을 가지는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리고 집아의 호족세력과 링크되면서 사회적인 전반적인 개혁을 모색하기도했어요 그러다가 최치원선생은 진성여왕에서 시무10조를 올렸고 최언위는 왕건을 최승우는 견훤을 보필했어요.

     

    후삼국시대가 드디어 막을올리는데요 아주조금만 적어보자면 후삼국시대에서의 국제적인 판로는 10세기때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큰변화가 일어났었는데 중국에선느 이제 대륙을 지배하던 당나라가 명망했었고 5대 10국이 난립해서 세력을 닽무했었고 북방에서느 거란족이 성장하면서 요나라를 건국하고 중국과 발해를 압박했어요 후삼국시대를 들여다보면 신라시대에는 진정여왕시기가 오면서 신라는 더욱더 혼란의 카오스였고 중앙정부의 통솔력과 장악력은 떨어져갔어요. 그러면서 귀족들의 지나친 수탈에 반발하면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반독립적인 지방세력인 호족이 성장했어요. 이러한 사회혼란이 갖우되는 가운데에서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후삼국시대가 막을 오르게되요

     

    먼저 후백제를 알아보면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세력을 토대로 해서 완산도에 도읍지를 설정하고 수백제를 세웠어요 이때가 900년이에요. 후백제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성장기반을 다져갔고 완산도는 지금의 전주에 해당해요. 그리고 견훤은 상주지방의 호족집안출신이였어요 신라 서남 해안의 경비를 담당하던 방위군이 장군으로 세력을 확장해섰고 우리가 아는 태조왕건에서 나오는 견훤이 이 견훤이맞아요 그리고 상주의 농민출신과 고아주의 호족출신이라는등 여러가지 카더라 하는 학설들이 많아요. 후백제의 발전을 살펴본다면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지역과 전라도 지역을 차지했어요. 그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해서 군샂거으로도 우위를 확보할수있어요. 그리고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는등 국제적인 감각도 떨어지지않았어요. 한꼐를 살펴보면 견후너은 신라에대해 매우 적대적인감정이였고 농민들에게는 조세를 쥐어짰으며 호족을 포섭하는데에 실패했기에 한계를 가지고있어요.

     

    후고구려는 궁예가 세웠는데 옴마니반메옴 아시죠? 궁예는 구너력투쟁에서 밀려나서 신라의 핏줄인데 신라왕족의 후예로 태어나서 신라에대한 반감이 상당했어요 처음에는 북원 지방의 도적집안인 양길의 아래에 들어가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에서의 중부지방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예성상 유역의 황해도 지였까지도 세력을 확장했어요 그는 세력이 커지자 양길을 축출하고 초적의 무릴르 기반으로해서 지금의 개성이죠 송악을 도읍지로 세우고 후고구려를 세웠어요 발전으로 는 궁예는 한강유역을 차지했고 그다음으로는 조령ㅇ르 넘어서 상주일대를 세력을 확충했어요 영주를 차지해서 옛신라땅의 절반이상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어요. 정치제도에는 영토가 확장되고 국가기반이 다져지자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태봉으로 또다시 바꿨어요 그리고 새롱누 정치 새로운 어떤무언가를 원했기에 관제를 마련학 골품제도를 없애도 새로운 신분제도를 넣었어요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과 여러관서를 설치해서 9관등제를 실시했어요 한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로한느 정치저기반이 너무 적었고 왕구너강화를 위해서 호족을 아우르지않고 오히려 억압하기에 이으렀어요 그리고 계속되는 전쟁을 위해서 지나친 조세를 거뒀고 그과정에서 죄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했어요 그리고 미륵신앙을 이용해서 전제정치를 도모했어요 그러면서 백성들과 신하들은 등을 돌리게되면서 왕건에의해서 죽음을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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