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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선덕여왕의 골품제, 모란꽃
    Study/역사 2020. 5. 5.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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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니다. 오늘은 저번 내용에 이어서 신라시대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에 대해서 적어보려 합니다.

    선덕여왕과 모란꽃에 얽힌 일화와 함께

    신라시대의 독특한 신분 구조인 골품제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생 미혼이였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신라 27대 선덕 여왕은 무척 아름답고 영리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당나라 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보고 난 선덕 여왕이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향기가 없을 것이다."
    신하들이 의아해 하면서 물었습니다.
    "어찌 그것을 아십니까?"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모여들 텐데 이 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벌과 나비가 보이지 않구나. 이는 향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어 선덕 여왕이 다시 말하였습니다.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우습게 여겨 희롱한 것이니라."
    왕의 명령에 따라 당나라에서 보낸 꽃씨를 심었지만 꽃이 피어도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은 다시 한번 선덕 여왕의 지혜로움에 감탄했습니다.

     

    신라시대 골품제

     

    그런데 선덕 여왕은 아름답고 영리하였지만 나라에서 결혼을 허락하지않았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왜 선덕 여왕에게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을까요?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품이라는 말의 뜻은 뼈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로, 타고난 신분에 차이를 둔다는 뜻입니다.

     

    골품제는 모든 사람을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3두품, 2두품, 1두품으로 나누어 차별을 두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골 귀족뿐이었습니다. 

    또한 성골은 성골 귀족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 습니다.
    그런데 선덕 여왕 시대에는 성골 남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선덕 여왕이 죽은 뒤에는 마지막 남은 여자 성골인 진덕 여왕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성골 귀족이 없었기 때문에, 성골 다음으로 높은 신분인 진골 귀족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성골 귀족이 없어진 이유는 신분을 지키기 위하여 성골끼리만 결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친척과도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점점 결혼할 수 있는 사람도 적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성골 귀족 가운데 선덕 여왕과 진덕 여왕만 남게 된 것 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아주 엄격하게 골품제를 지켰습니다.

    성골, 진골 밑에 있는 6두품, 5두품, 4두품은 관리가 될 수 있는 귀족 계급이었고, 3두품, 2두품, 1두품은 관리가 될 수 없는 평민이었습니다.

     

    골품 제도는 본래 여덟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차츰 성골이 없어지고, 1두품, 2두품, 3두품의 평민 구분이 없어지면서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백성으로 다섯 등급이 되었습니다.

    골품세에서는 자신이 속한 등급에 따라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지금현재로 보면 장관직은 진골만이 될 수 있었으며, 6두품은 아무리 노력해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5두품과 4두품으로 등급이 내려갈수록 관직은 낮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있는 오늘날과는 달랐습니다.

     

    이러한 골품제는 일상 생활에도 영향을 주어 입을 수 있는 옷감의 종류와 색깔도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재료로 만든 옷감이라도 고운 옷은 골품이 높은 사람만 입었습니다.

     

    그러나 4두품과 그 아래 일반 백성들은 호랑이 가죽이나 당나라에서 수입한 고급 털옷은 입을 수 없었습니다.
    이 외에 수레를 꾸미는 장식에도 차이가 있었고,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의 종류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금은 왕실과 절에서만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집의 크기도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규정들이 무척 답답해 보이지만 고대인들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크게 불만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대다수의 백성들이 나라에서 정한 규칙을 어기면서 생활할 만큼 잘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한테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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