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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위화도회군부터 시작된 조선건국 1392년 10월Study/역사 2020. 5. 11. 23:23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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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왕조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새 도읍을 한양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지를 둘러싸고 서로 생각이 다르다 보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도 있었습니다.왕위를 얻기 위한 싸움에서 승리한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여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지금부터 조선 건국전 이야기와 조선이 세워지면서 함께 새로 태어난 한양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해요~
조선 건국 前
고려 말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고려 왕실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몽주는 혼란스러운 고려 왕조를 더욱더 새롭게 바꿔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개혁이 고려 왕조 안에서 이루어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달리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은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힘을 얻은 이성계는 우왕, 장왕을 쫓아 낸 뒤 공양왕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토지 제도를 바꾸고 정몽주 등 반대파를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이성계는 새 나라를 세우면 고려에 반역했다고 백성들에게서 원성을 살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만큼 민심과 여론이 중요하다는 거겠죠 그래서 고려 왕실의 어른인 왕대비의 지시를 받아 공양왕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했습니다.그런 다음 공양왕으로부터 왕의 도장인 옥새를 넘겨받은 배극렴, 정도전 등이 이성계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의식을 치르게 했습니다.
이성계는 못 이기는 적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대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을 임시로 고려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의 '권지 고려 국사'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고려에서 벼슬을 했던 사람들은 새 나라를 섬기는 것이 충절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깊은 산골로 들어가거나 조용한 시골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몇몇 고려 충신들이 관복을 벗고 개성 송악산의 두문동 골짜기(개성)로 들어가서 숨어버리자
이성계가 이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오지 않자 두문동 골짜기에 불을 질러 죽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뒤로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사람들을 두문동 72 현이라고 불렀으며, 한 곳에 틀어박혀 세상 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두문 불출(杜門不出)' 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입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제도를 서둘러 바꾸지 않고, 고려 왕족들을 부드럽게 달랬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전국의 토지를 조사해서 경기 지방에 사는 벼슬아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과전법을 실시하고, 호포도 일부 줄여 주었습니다.
또한 관청의 땅이었다가 개인의 땅으로 변해 버린 둔전을 없애 버렸습니다.
1392년 10월 태조 이성계는 정식으로 명나라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새 왕조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단군과 기자가 썼던 '조선'을 나라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조선이라고 정한 것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전통이 중국만큼 오래되고 문화 역시 중국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바탕에 둔 것입니다
지금의 서울은 60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의 수도입니다.
이것은 1394 년 새 왕조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로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여 기서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새 왕조가 한양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펴봅시다.
서울인 한양은 태조의 스승이었던 무학 대사와 조선을 세우는 데 공이 많았던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태조 자신도 여러 곳을 몸소 돌아봤으며, 서울이 도읍지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생긴 일들은 아직도 무악재나 왕십리와 같은 지명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왕십리라는 이름은 무학 대사가 서울이 될 만한 좋은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10리를 더 가서 도읍을 정하라고 알려 준 데서 생겨났으며, 무악재는 무학 대사의 무학이란 이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한양은 한강 하류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잇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남경이라 해서
고려에서 중요한 세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고려 귀족들은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경치를 즐겼다고 합니다.
자, 그럼 태조에서 태종에 걸쳐 완성한 한양의 모습을 구경해 보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태조는 조상들을 모시는 사당인 종묘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땅과 곡식을 지키는 신을 일컫고, 나라를 상징하는 사직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직단을 세웠습니다.
종묘와 사직단 가운데에는 경복궁을 세웠습니다. 경복궁에는 왕이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을 알맞은 자리에 나누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건물에는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비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태종은 경복궁 동쪽에 창덕궁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병이 나거나 화재로 궁궐을 떠나야 할 때 두 궁궐을 옮겨 가며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밖에는 큰길을 내었는데, 그 길 양쪽에는 의정부와 육조가 들어섰습니다. 이밖에도 오늘날 서울의 시청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부 등 중요한 관청들이 들어섰습니다.
이 거리를 육조 거리라고 불렀습니다.
또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큰 길이 났으며 종로에서 창덕궁, 남대문, 동대문에 이르는 길 양쪽으로는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나라와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파는 상점인 시전이었습니다. 이 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 종로입니다. 종로 큰길은 물렀거라 를 외치며 지나가는 대감들의 행차가 끊일 날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에게는 무척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종로에는 피맛골이라는 뒷골목이 생겨났습니다. 피맛골은 가마 행렬을 피하여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이었습니다. 피맛골을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뒷골목에 음식점 등 서민들이 즐겨 찾는 상점이 들어섰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 안의 모든 땅은 나라의 것이었고, 백성들은 땅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전 지역을 5부와 52방으로 나누어 한성부에서 관리했습니다.
성 북쪽에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사는 동네가 있었고, 성의 중심부에는 역관이나 의관과 같은 기술관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산 아래에는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성 안의 생활환경을 좀 더 좋게 하기 위해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한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정리하여 개천을 파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청계천이라는 지명은 맑은 물이 흐르던 그때의 개천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한편 개천 위로는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때에는 20만여 명의 사람을 불러 내어 흙과 돌로 성을 쌓았습니다. 성에는 각각 네 개의 큰 문과 작은 문을 만들어서 이를 통해 성 밖을 오고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이처럼 새 왕조 조선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한양은 그 뒤로 600년 동안 조선의 서울로서 그 역할을 다 했으며, 오늘날에도 그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
조선 시대 과거는 소과, 문과, 무과, 잡과 4 종류가 있었으며, 보통 특별한 국가재난이 없으면 3년에 한 번씩 열렸습니다.소과는 문과 시험을 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시험으로, 생원시와 진사시라고 하는 유교 경전과 문학 등의 시험에 합격해야 생원 또는 진사라는 호칭을 받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습니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다시 초시, 복시, 전시 3단계 시험을 거쳐야 비로소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병법에 관한 학문과 무예를 시험하는 무과는 무관 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으로, 문과와 마찬가지로 초시, 복시, 전시 세 단계를 거쳐야 했습니다.
한편 잡과는 의술이나 역관, 음양, 이과 등의 기술적 시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양반들이 응시했지만 유교의 보급으로 기술직을 천시하는 풍조가 퍼지면서 양반들이 응시를 기피하여, 중인들만이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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