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조선시대 향약 두레 품앗이 계 초간단정리
    Study/역사 2020. 6. 15. 22:15
    반응형

    Pre.

    오늘은 조선후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합니다

    이미 지나간 설날과 곧 다가올 추석은 당시 농민들에게는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가족들과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보내고 맛있는것을 먹으며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농업이 가장 최고였던 그 시대에서 두레를 만들어서 서로 이웃간에 힘을 합쳤고 여러 계모임을 통해서 이웃들과

    더욱 더 가까이 지내고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미풍양속이 있었다고하는데요

    지금부터 시작해볼게요~

     


    농사일은 매우 고된 일입니다. 아무리 부지런하고 힘센 장정이라도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혼자 밭을 맨다면 힘들고 지루해서 일을 오래 할 수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모내기 같은 일은 봄에 부지런히 해서 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공동으로 일을 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마을 단위로 두레라는 조직을 만들어 함께 일했습니다.

    [농부가]

    엉덩 밑의 김서방은 밥만 먹고 일 못하네
    앞에 가는 박서방은 술 한 잔에 일 잘 하네
    어허 어허 어허 어이어로 상사뒤야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가까워 온다.
    이 배미심고 저 배미 심어 장구배미로 넘어가세
    어허 어허 어허 어이어로 상사뒤야


    이 노래는 진도 지방의 농부가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흥이 저절로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두레의 공동 작업은 모내기부터 김매기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대개 새벽 네 시에 시작하여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쯤 일을 끝냅니다. 두레꾼들은 풍물 소리가 울리면 모여서 나팔을 신호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두레꾼 가운데 한 명이 먼저 노래를 부르면 모두 한 목소리로 따라 부릅니다. 또 쉴 때에는 풍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피로를 덜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명이 힘을 합쳐 노래를 부르며 즐겁 게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모내기의 힘겨움도 잊고 일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면 두레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두레는 마을 단위로 만들었는데 보통 열여섯 명에서 쉰다섯 명 정도의 남자들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한 집에 여러 명의 남자가 있으면 모두 참여해야 했습니다. 

    두레에 처음 참여하려는 남자는 자기의 힘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찬성을 얻어야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또 마음대로 두레에서 빠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레를 관리하기 위해서 두레꾼들 가운데서 몇 사람을 뽑아 책임을 맡겼습니다. 두레꾼이라 함은 두레에 참여하는 농민을 말합니다.

    먼저 마을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사람을 뽑아서 행수라고 부르고 무리를 이끌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행수를 도와 주는 도감을 뽑았으며, 작업을 지휘하는 숫총각과 두레꾼의 행동을 감시하는 조사 총각을 뽑았
    습니다. 그리고 글을 알고 계산을 잘하는 사람으로 회계일을 맡을 유사를 뽑았습니다.

     

    마을에 모인 두레꾼들은 함께 일을 하면서 힘든 일을 서로 도우며, 힘을 모아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전통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나 작업을 시작할 때, 끝낼 때에는 항상 풍물을 곁들였습니다. 풍물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흥에 맞춰 일을 능률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풍물로 흥을 돋우면 지루하고 힘든 농사일도 즐겁게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말기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두레의 풍경을 보고 다음과 같이 비
    웃었습니다.
    "조선의 농민들은 일은 하지 않고 놀이와 술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사들이 잘못 본 것입니다. 일을 할 때도 즐겁게 하는 우리 민족의 성격을 잘 모르고 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두레를 통해 협동 노동이 발전했고, 규모가 작은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품앗이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집에서 김장이나 길쌈을 하면 몇 집이 어울려 한 집 일을 끝내 주고 다음 집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와 같이 힘든 일을 함께 하면 훨씬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이 하나로 뭉쳐 마을의 발전을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지금은 두레의 모습이 농촌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서로 돕는 훌륭한 전통은 앞으로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서로를 도와서 어려움을 이겨 나가보자


    조선 시대 농민들은 어려운 일에 대비하여 계를 들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계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서로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계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있었지만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특히 널리 퍼졌습니다.

     

    계는 돈이나 쌀과 같은 곡식 등을 조금씩 내어, 순서를 정한 뒤 계원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가져갑니다. 또는 이를 모아 두었다가 어려울 때에 쓰기도 했습니다. 계모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만약 계원이 자기 몫을 내지 않으면 계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계가 많아서, 촌마다 계가 있고 집안마다 계가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의 말처럼 그 때 수없이 많은 계가 생겨났습 니다. 네댓 사람이 하는 계에서부터 수십 명 심지어 수백 명이 참여하는 큰 규모의 계까지 매우 다양했습니다. 선비들이 앞장 선 서로 돕기 운동 조선 전기 학자들은 향약을 만들어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의 향약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덕업 상권) 
    2. 잘못된 일은 서로 벌 준다(과실 상규) 
    3. 좋은 풍속은 서로 나눈다(예속 상교) 
    4.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환난 상휼)

     

    이 운동은, 이이, 이황과 같은 성리학을 믿는 학자들이 앞장 서서 펼쳤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지방 자치제와 비슷한 성격으로, 그 지역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 좋은 고장을 만들어 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비록 학자들이 장려했지만 강제로 시킬 수는 없는 일이어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향약의 정신이 계나 두레 등의 협동 정신으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는 계원의 신분이나 사는 곳, 나이,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로 구별되었습니다. 그 무렵 계의 종류를 살펴보면 한 마을이나 이웃에 사는 사람들끼리 드는 동계, 농민들 또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든 직업계가 있었습니다. 도살업자들은 우피계, 뱃사람들은 선계, 어민들은 어망계, 농민들은 농사에 필요한 돈이나 소를 마련하기 위해 농계나 우계를
    조직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신협 농협 수협 축협 이라고도 볼수있을것같아요

     

     

    그 외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지계, 같은 또래가 모인 동갑계, 같은 서당에 다니는 학생이 모인 학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대비하기 위한 대동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계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마을마다 군포세를 내기 위해 동포계라는 것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군포는 군역을 진 장정들이 내는 세금이었는데, 그 부담이 너무 커서 마을마다 도망가는 장정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도망간 장정의 군포는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대신 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막 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미리 베와 무명을 조금씩 거두어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포계입니다.

     

    계에는 계원들이 뽑은 계장과 사무를 맡아 보는 유사 등이 있었습니다. 또 일정한 규칙을 정하여 계원들이 꼭 지키도록 하고 만약 그것을 어기는 경우에는 계모임에서 내쫓거나 벌을 주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생겨난 계는 경제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계는 이웃과 어울려 살기 좋아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착한 마음씨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풍속입니다. 백성들은 관리들의 수탈과 자연 재해로 계속된 가난 속에서도 서로 도우며 슬기롭게 어려움을 이겨 나갔습니다.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